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평가 및 영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갑오개혁 반영내용.png|width=100%]]}}}|| || {{{#000,#fff 폐정 개혁안과 갑오개혁에 반영된 내용.}}} || 교과서 수준에서는 반봉건 반외세에 기초한 근대성을 지향한 운동이었다고 언급되지만 유교적 근왕주의에 기초한 민란으로도 평가된다. 동학 운동이 근대적 국가를 지향한 운동이었음의 증거로 제시되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오지영이 1940년대 쓴 《동학사》에만 등장하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 소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오지영의 '소설'이란 표현은 겸양의 표현일 뿐 픽션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 반박하였으나, 이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동학사에만 출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출처바람] 실제 전봉준이 작성한 무장 창의문을 보면 근왕주의적 색채가 매우 뚜렷하며, 심지어 김개남은 스스로 왕을 참칭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지금 시점에서의 근대성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는 것이 중론. 다만 모든 동학교도들이 근왕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상당수는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예언서인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서 "이제 곧 조선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 조선의 예언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 [[전주 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반외세를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써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만 향반 지주 계층과 농민군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농민군 진압 후에도 관련자 색출 및 학살은 이어졌다. 의병을 이끈 향반층은 곧 농민군에 대항한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의병 전쟁기까지 살아남은 농민군도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학 농민 운동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 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기존 조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중화주의 외교 질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영일동맹|일본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북한]]의 교과서 《조선력사》는 80년대 당시 남한 학계와 달리 "농민 전쟁"으로 평가했다. 개화파가 지도층이고 농민이 이를 추동한다는 주장 하에 '부르죠아 개혁 사상'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김일성과 연관된 인물이 적었으므로 그의 아버지 [[김형직]]의 우상화를 위해 평양의 [[3.1운동]]이 강조된 것과 달리 '과거의 봉건통치배'가 얼마나 나쁜가를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지역주의를 대놓고 강조하는 것은 북한도 적화통일을 위해 꺼리고 '지방주의'라며 금기시 되므로 '우리나라'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곳의 모든 역사를 가르친다. [[홍경래의 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이 내용은 아예 "1894년 농민전쟁"이라며 목차까지 잡아놓고 가르친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72784/1/09.pdf|#]] 2000년대에도 내용은 비슷하다. '노동계급의 당'이 영도하지 않으면 모두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없이 실패한다는 원칙을 여기서도 드러낸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102034|#]] 2002년 교과서에서도 홍경래의 난이 아예 별도 목차로 추가되었으나 동학 농민 혁명도 그 분량은 "갑오 농민 전쟁"이라며 한 절의 목차로 잡혀 있으며, 분량은 홍경래의 난은 물론 3.1운동보다도 많다. 단일 사건으로는 [[임진왜란]] 다음으로 많은 비중이다. [[http://dl.nanet.go.kr/law/SearchDetailView.do?cn=KDMT1200847133|#]] 신라 적고적, 고려 망이와 망소이의 난, 조선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농민항쟁보다도 높게 취급하며 태평천국 운동, 세포이 항쟁 급의 가장 급이 높은 사건으로 취급하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김일성 같은 인물이 지도하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소설가 [[박태원(소설가)|박태원]]이 말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으며, 이는 박태원의 마지막 작품이다. 비교적 근세에 일어난 일이라 호남 지역에는 가까운 조상이 동학에 가담했던 케이스가 매우 많다. 특히 동학 참여 이후 생존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고향을 등지고 다른 호남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의 고향이 호남 지역이라면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일반 시민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뿌리를 동학 혁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독재]]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형태의 국가들이 많은데,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화를 이룩한 건 국민들의 피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뿌리는 동학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동학 농민 운동의 대표자로 유명한 전봉준조차 전제군주정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2차 봉기의 목적은 일제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고종을 인질로 잡으니까 고종을 구출하려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1차 봉기에선 정치에 간섭하기 싫어서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이 2차 봉기에서는 '왕을 구하려고' 참여한 것이다. 즉 동학 농민 운동은 명백하게 [[민주주의]]가 아닌 [[전제군주제]]를 긍정하는 입장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좀 지나친 비약이다. 동학 농민 운동이 내세운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보면 고위층을 처벌하라는 내용은 있을지언정 고위층을 아예 폐지하라는 식으로 완전한 자유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이나, 고위층은 보존하되 의회 설치 등을 통한 입헌군주제식 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의 공통점은 단지 아래에서 중앙에 대항해서 일어난 저항 운동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전제국가의 국민들이 현대 민주주의 이념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동학농민운동을 단순한 민란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왕에게 청원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의 민란들과는 달리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왕명을 받은 군수와 협상하거나 양반을 배제한 향촌자치를 실현하기도 하는 등 농민들이 정치적인 주체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민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1차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포고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지만, 농민군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ruby(君臣, ruby=군신)]과 [ruby(父子, ruby=부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ruby(家國, ruby=가국)]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ruby(賢良, ruby=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ruby(堯舜, ruby=요순)]의 [ruby(德化, ruby=덕화)]와 [ruby(漢, ruby=한)]나라 [ruby(文帝, ruby=문제)]와 [ruby(景帝, ruby=경제)]의 치세를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략) [ruby(虐政, ruby=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고,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ruby(管子, ruby=관자)]가 말하기를 “[ruby(四維, ruby=사유)]{{{[}}}[ruby(禮義廉恥, ruby=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ruby(公卿, ruby=공경)]으로부터 [ruby(方伯守令, ruby=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었다.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ruby(草野, ruby=초야)]의 [ruby(遺民, ruby=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ruby(危亡, ruby=위망)]을 [ruby(坐視, ruby=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ruby(億兆蒼生, ruby=억조창생)]이 [ruby(詢議, ruby=순의)]하여 지금 [ruby(義, ruby=의)]의 깃발을 치켜들고 ‘[ruby(保國安民, ruby=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논문 내 주석)「 隨錄」(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총서』 5, 157~159쪽「; 茂長布告文」『 東學亂記錄』 上(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7), 142~143쪽「; 東學文書」(茂長縣東學布告文)『 총서』 5, 136쪽「; 東匪討錄」(東學輩布告文『) 동학서』, 303~304쪽.]|| > ><포고문>은 유교적 언어, 유교적 사유에 의한 현실 진단과 비판이 민본과 인정 이념에 입각하여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논문 내 주석)동학농민전쟁이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 가운데 하나인 신용하는 <무장포고문>에 대한 분석을 외면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 <포고문>은 농민전쟁 초기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국왕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유교의 언어와 사상으로 粉飾되어 있다는 것이다{{{[}}}신용하「,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 한국학보』 40(서울, 일지사, 1985), 126쪽{{{]}}}.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농민전쟁 초기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승승장구하던 시기는 물론 농민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농민군이 제시한 글의 대부분은 그러한 “분식된 유교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농민군의 생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ruby(草野遺民, ruby=초야유민)]{{{]}}}에 불과하지만,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치자계층을 대신하여 임금의 땅에서 먹고 사는 왕민으로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보국안민”의 [ruby(義旗, ruby=의기)]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곧 민본이념이 붕괴되고 인정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경전의 자구나 내용 분석에서 찾는 경우도 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농민전쟁을 농민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민란에 비추어 볼 때도 하나의 도약 내지 비약으로 받아들이고, 둘째, 이러한 도약을 위해서는 의식면에서 혹은 사상면에서 도약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셋째, 동학이야말로 그 도약대 역할을 하였거나, 농민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근거였다는 이해이다.[* (논문 내 주석)정창렬「, 갑오농민전쟁연구」(서울,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38쪽; 조경달/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서울, 역사비평사, 2008), 27~28쪽.] >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사상적 도약대가 필요할 만큼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하거나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동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동경대전』에는「 개벽」이라는 용례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용담유사』에는 5회 나오지만, ‘천지개벽’적 상황을 전제한 것은 아니었다.[* (논문 내 주석)『 용담유사』에 나오는 ‘개벽’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용담가」(2회,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안심가」(2회, “개벽시 국초일을 만지장서 나리시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1회,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의 행동 역시 기본적으로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ruby(弊政改革案, ruby=폐정개혁안)]>에서 보이는 농민군의 요구조건 역시 “개벽”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동학교도나 농민군들이 내세운 핵심 목표는 계속 바뀌어 갔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규정하는 내용도 변해갔다. 그러나 동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조차도 유교적 가치를 부정한 적은 없다. 척왜양운동 시기에는 화이론적 세계관과 충효사상이, 농민전쟁 시기에는 민본과 인정 등 유교 이념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 (논문 내 주석)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배항섭, 「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유교 이념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77(서울, 조선시대사학회, 2016b) 참조).] 이 점은 다른 나라의 민중운동에서도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논문 내 주석)이에 대해서는 배항섭, 「19세기 지배질서의 변화와 정치문화의 변용 -仁政 願望의 향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39(서울, 고려사학회, 2010), 114쪽 참조.] >---- >배항섭(201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95070|「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과 유교」]], 『역사학보』 236, 역사학회 > 이글은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까지 동학교도 혹은 농민군의 격문이나 통문을 통해 농민군의 사상적 기반이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살핀 것이다. 교조신원운동 시기 동학교도돌의 목표는 교조의 신원이나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요구에서 척왜양으로 변화하였다. 이어 고부봉기 시기부터는 치자층의 탐학이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제2차 봉기에서는 다시 척왜양이 전면에 등장한다. 정체성 면에서 동학과 관련된 내용은 점차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들어 다시 동학과 관련된 요소가 강화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의 ‘개벽’ 사상에서 찾는 경우도 있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할 만큼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 >-배항섭, 같은 논문 초록 무엇보다도 농민군들 스스로가 내세운 말들에서도 매우 유교적이고 근왕적인 세계관이 엿보인다. 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임금의 교화"를 누리고자 하였으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무너졌음을 한탄했다. 교조신원운동에서조차 유교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서양의 시민혁명과 연결하거나 한국 민주정의 뿌리로 인식하는 것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한국사에 억지로 끼워맞춘 서구중심적, 근대중심적 역사인식에 가깝다. 또한 동학과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동일시할 순 없지만, 최시형의 사상도 신분해방과는 거리가 있다.그것은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도피 중이던 최시형은 제자들에게 당부한 다음과 같은 훈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ruby(天生萬民, ruby=천생만민)]이로되 [ruby(各其分數, ruby=각기분수)]가 모두 있느니라. [ruby(儒生, ruby=유생)]과 농민의 [ruby(衣食品數, ruby=의식품수)]가 모두 다르니라. 선비는 [ruby(布木, ruby=포목)]이라도 8-9승의 가늘게 입고, [ruby(食器, ruby=식기)]가 조금 적게 조처하는 것이 분수요, 농민으로 일꾼은 옷도 5-6승에 불과하고 식기도 조금 [ruby(高大, ruby=고대)]하게 하는 것이 각기 직분이니 매사를 분수대로 대인접물도 하려니와 분수를 [ruby(善守手, ruby=선수수)]할지어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지나치면 이 또한 [ruby(違基命, ruby=위기명)]이니라고 교훈하시더라. >---- >-曺錫憲, 「昌山后人曺錫憲歷史」, 『총서』 10, p.202. 또한 최제우에 대한 미담(하녀 두 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음)도 신분제 철폐 주장을 동학이 하였다고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 만인을 존귀하게 대우하는 것과 사회적인 신분제 철폐 주장은 다른 것이니까. >물론 동학사상이 유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학경전에는 유교를 상대화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등 기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적 요소가 없지 않다.[* (논문 내 주석)농민군의 언행에도 이단적 요소가 있었다. 黃玹에 따르면 동학교도들은 “장차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나는데 앞으로 큰 난이 일어나 동학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양민을 속였다고 한다(黃玹, 「梧下記聞」『총서』 1, pp.42-43). 이는 적어도 일부 교도들 가운데는 이단적 그룹이 존재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동학경전에는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체제에 대한 비판이 매우 취약하다.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논문 내 주석)「교훈가」, 『용담유사』] 상대적으로 과격한 표현도 있지만, 다른 데서는 오히려 유교와 "[ruby(大同而小異, ruby=대동이소이)]"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논문 내 주석)“覺來夫子之道則一理之所定也論其惟我之道則大同而小異也”(「수덕문」, 『동경대전』)] > >또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만은”이라는 구절도[* (논문 내 주석)「안심가」, 『용담유사』] 동학이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용담유사』에서 보이는 다음의 몇 가지 구절 역시 동학이 유학을 전혀 배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적 덕목이나 가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 >||이는 역시 그러해도 수신제가 아니하고 도성입덕 무엇이며 삼강오륜 다버리고 현인군자 무엇이며[* (논문 내 주석)「도수가」, 『용담유사』]|| > >||강산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 살펴보니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있지마는 인심풍속 괴이하다.[*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 > >||나도 또한 충렬손이 초야에 자라나서 군신유의 몰랐으니 득죄군왕 아닐런가.[*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 > >||요순지세에도 도척이 있었거든 하물며 이세상에 악인음해 없단말가 공자지세에도 환퇴가 있었으니 우리역시 이세상에 악인지설 피할소냐 수심정기 하여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 군자말씀 본받아서 성경이자 지켜내어 선왕고례 잃잖으니 그 어찌 혐의되며 세간오륜 밝은법은 인성지강으로서 잃지말자 맹세하니 그 어찌 혐의될꼬.[* (논문 내 주석)「도덕가」, 『용담유사』]|| > >||임금에게 공경하면 충신열사 아닐런가.[*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 >---- >동학사상에는 이미 유교적 요소가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동학의 포교과정에서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유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학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전봉준 역시 동학을 유교적 측면에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것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배항섭(2018),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31594|「 동학에서 보이는 ‘전통’과 새로운 사유 」]], 『민족문화논총 』 7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물론 모든 농민군 구성원을 하나의 사상으로 일반화시켜 설명하기는 어렵다. 1893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천주교 주교인 뮈텔 주교한테 보내진 이른바 '뮈텔 문서'에 의하면, 1892년 8월에 전라남도 무장의 사찰인 선운사를 습격하여 돌부처에 숨겨진 금과 은을 빼앗은 3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먼저 서양과 왜적을 멸한 후에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이씨와 민씨들을 전멸시키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서 이씨란 조선왕조의 왕족인 이씨들이고 민씨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들이니, 이 선운사 사건을 저지른 동학교도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을 모두 절멸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구한말의 동학교도들이 모두 전봉준처럼 근왕 사상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적지 않은 동학교도들은 예언서 [[정감록]]에 적힌 "이씨 조선 왕조는 곧 망하고 이제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는 예언을 믿었다.[*김탁,2016 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 실제로 구한말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행동들을 보면, 그들이 충실한 근왕 세력이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1871년 3월 10일 경상북도 영해(寧海)의 관아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아를 점령한 이른바 [[이필제의 난]]에 가담한 180여명의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동학교도였고, 심지어 이 반란에 자금을 지원한 인물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년)이었다. 비록 동학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격문에서 근왕을 외쳤어도, 당시 동학군을 관찰한 황현과 박봉양 같은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들 중 대부분은 동학군이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정씨 왕조의 등장을 예언한 정감록을 신봉했다고 언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전봉준의 격문에 적힌 근왕 성향을 믿지 못하고, 동학교도들이 왕조의 전복을 노리는 반정부 세력이라고 규정하여 잔혹하게 진압했을 가능성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